파란 바탕에 그려진 토토로의 실루엣이 화면에 뜨는 순간, 우리는 조건반사적으로 어떤 선율을 떠올립니다. 미야자키 하야오(Miyazaki Hayao)가 그려낸 환상의 세계는 히사이시 조(Hisaishi Joe)의 음악을 만났을 때 비로소 완벽한 생명력을 얻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존 윌리엄스가 있다면,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는 히사이시 조가 있습니다. 1984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2023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까지, 장장 40년에 걸친 두 거장의 동행은 애니메이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파트너십으로 기록됩니다. 오늘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명작들 속에 숨겨진 히사이시 조의 음악적 마법과 그 뒷이야기를 심층 분석해 봅니다.

1. 운명적 만남: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984)
"이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자."
당시 무명의 작곡가였던 히사이시 조는 원래 '이미지 앨범(영화 제작 전 분위기를 잡기 위해 만드는 음악)' 작업에만 참여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온 곡 <바람의 전설>을 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는 큰 충격을 받았고, 즉시 그를 본편 음악 감독으로 발탁합니다.
🎵 감상 포인트: '나우시카 레퀴엠'과 미니멀리즘
- 신디사이저의 활용: 초기 지브리 음악은 예산 문제와 당시 트렌드를 반영하여 신디사이저(전자음)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이는 황폐해진 미래 지구의 건조하고 이질적인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 아이의 허밍: 영화 후반부, 거신병과 오무의 폭주가 멈춘 뒤 흐르는 "란~ 란라라 란란란~" 하는 소녀의 허밍 곡(나우시카 레퀴엠)은 사실 히사이시 조의 4살 딸(마이)이 부른 것입니다. 기교 없는 아이의 목소리는 파괴된 세상에서 피어나는 순수한 희망을 상징하며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습니다.
2. 순수의 시절: 이웃집 토토로 (1988) & 마녀 배달부 키키 (1989)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
지브리의 초기작들이 서사적이고 묵직했다면,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일상의 소중함과 동심을 노래합니다. 히사이시 조는 여기서 '리듬감'과 '경쾌함'을 무기로 꺼내 듭니다.
🎵 감상 포인트: 바람이 지나가는 길 (Path of the Wind)
- 동양적 5음계: <이웃집 토토로>의 삽입곡 '바람이 지나가는 길'은 일본의 전통적인 5음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신비로우면서도 촌스럽지 않은 이 멜로디는 시골 마을의 논두렁과 숲의 정령을 청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 냈습니다.
- 바다의 보이는 마을 (키키):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는 유럽의 항구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아코디언과 만돌린 같은 악기를 사용하여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왈츠풍의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키키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오를 때 흐르는 바이올린의 피치카토(현을 뜯는 주법)는 비행의 설렘을 경쾌하게 표현합니다.
3. 대서사시의 완성: 원령공주 (Princess Mononoke, 1997)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
지브리 역사상 가장 무겁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룬 <원령공주>에서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웅장한 오케스트라로 진화합니다. 자연과 인간의 전쟁이라는 거대한 스케일을 감당하기 위해 그는 도쿄 시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동원했습니다.
🎵 감상 포인트: 아시타카의 전설 (The Legend of Ashitaka)
- 비장미의 극치: 도입부의 묵직한 팀파니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오는 현악기 섹션은 주인공 아시타카가 짊어진 가혹한 운명을 대변합니다.
- 불협화음의 미학: 재앙신(타타리가미)이 등장할 때 쓰인 음악은 불협화음과 금관악기의 거친 포효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자연의 분노와 공포를 본능적으로 느끼게 합니다.
- 카운터테너의 기용: 주제가 <모노노케 히메>를 여성 소프라노가 아닌 남성 카운터테너(가성) 미라 요시카즈에게 부르게 한 것은 신의 한 수였습니다. 성별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숲의 목소리'처럼 들리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4. 상실과 추억: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001)
"한 번 있었던 일은 잊을 수 없어. 기억해 내지 못할 뿐이지."
일본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했던 이 작품에서 히사이시 조는 '피아노'라는 가장 기본적인 악기로 돌아갑니다. 주인공 치히로의 불안한 심리와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은 화려한 오케스트라보다 담백한 피아노 선율이 더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 감상 포인트: 어느 여름날 (One Summer's Day)
- 여백의 미: 오프닝 곡인 '어느 여름날'은 제목 그대로 나른하고 몽환적인 여름 오후를 연상시킵니다. 피아노 건반을 꾹꾹 눌러 담는 듯한 연주는 치히로가 겪게 될 이상한 나라의 모험이 결국은 '성장통'임을 암시합니다.
- 여섯 번째 역 (The Sixth Station): 가오나시와 함께 기차를 타고 제니바를 만나러 가는 장면. 바다 위를 달리는 기차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 위로 흐르는 이 곡은 절제된 피아노와 현악기로 '이별'과 '순환'을 표현합니다. 대사 한마디 없는 이 시퀀스가 영화 최고의 명장면이 된 것은 전적으로 음악의 힘입니다.
5. 삶의 회전목마: 하울의 움직이는 성 (2004)
"기다려, 내가 꼭 갈게. 미래에서 기다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지브리 음악, <인생의 회전목마(Merry-Go-Round of Life)>가 탄생한 영화입니다. 19세기 말 유럽의 낭만과 마법, 그리고 전쟁이 뒤섞인 이 복합적인 세계관을 히사이시 조는 '왈츠(Waltz)'라는 하나의 장르로 묶어냈습니다.
🎵 감상 포인트: 왈츠의 변주
- 3박자의 마법: 왈츠의 '쿵-짝-짝' 하는 3박자 리듬은 끊임없이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상징함과 동시에, 저주에 걸려 노인이 된 소피와 겁쟁이 마법사 하울의 엇갈리는 관계를 춤추듯이 표현합니다.
- 변주(Variation)의 향연: 이 영화의 메인 테마는 단 하나입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슬프게, 경쾌하게, 웅장하게 끊임없이 변주됩니다. 특히 후반부, 하울과 소피가 공중 산책을 할 때 오케스트라가 총동원되어 터져 나오는 왈츠는 사랑의 환희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 비하인드: 미야자키 감독은 처음에 이 곡을 듣고 "너무 슬프지 않나?"라고 우려했지만, 히사이시 조는 "이 영화는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전쟁과 사랑의 아픔을 다루고 있다"며 왈츠를 고집했다고 합니다.
6. 미니멀리즘으로의 회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2023)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 번복작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이 작품에서 히사이시 조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갔습니다.
🎵 감상 포인트: Ask Me Why
- 웅장한 멜로디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Ask Me Why>는 충격적일 만큼 단순하고 고요합니다. 멜로디는 절제되어 있고, 피아노의 여음은 길게 이어집니다.
- 이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두 거장이 화려한 기교를 모두 내려놓고, 삶과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독백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지 않느냐"는 무언의 메시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마치며: 끝나지 않는 앙상블
히사이시 조의 음악 없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색채가 빠진 그림과 같을 것입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서로에게 최고의 영감이 되어준 두 사람 덕분에, 우리는 2D 화면 속 캐릭터들이 살아 숨 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밤, 눈을 감고 지브리의 OST를 재생해 보세요. 토토로의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하울의 성이 삐걱거리는 소리, 그리고 치히로가 달리던 바다 위의 기차 소리가 당신의 귓가에 생생하게 되살아날 것입니다.
💡 에디터의 추천: 히사이시 조를 200% 즐기는 법 (부도칸 콘서트)
유튜브에서 'Joe Hisaishi in Budokan (Studio Ghibli 25 Years Concert)' 영상을 꼭 찾아보시길 강력 추천합니다.
- 압도적 스케일: 200명의 오케스트라, 800명의 합창단, 160명의 마칭 밴드가 참여한 전설적인 콘서트입니다.
- 미야자키의 등장: 콘서트 도중 미야자키 하야오가 꽃다발을 들고 무대로 올라와 히사이시 조에게 건네는 장면은 두 거장의 깊은 우정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