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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이시 조와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에 영혼을 불어넣는 40년의 동행

by snap29 2025. 12. 18.

 

 

파란 바탕에 그려진 토토로의 실루엣이 화면에 뜨는 순간, 우리는 조건반사적으로 어떤 선율을 떠올립니다. 미야자키 하야오(Miyazaki Hayao)가 그려낸 환상의 세계는 히사이시 조(Hisaishi Joe)의 음악을 만났을 때 비로소 완벽한 생명력을 얻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존 윌리엄스가 있다면,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는 히사이시 조가 있습니다. 1984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2023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까지, 장장 40년에 걸친 두 거장의 동행은 애니메이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파트너십으로 기록됩니다. 오늘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명작들 속에 숨겨진 히사이시 조의 음악적 마법과 그 뒷이야기를 심층 분석해 봅니다.

 

히사이시 조와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에 영혼을 불어넣는 40년의 동행
히사이시 조와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에 영혼을 불어넣는 40년의 동행


1. 운명적 만남: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984)

"이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자."

당시 무명의 작곡가였던 히사이시 조는 원래 '이미지 앨범(영화 제작 전 분위기를 잡기 위해 만드는 음악)' 작업에만 참여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온 곡 <바람의 전설>을 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는 큰 충격을 받았고, 즉시 그를 본편 음악 감독으로 발탁합니다.

🎵 감상 포인트: '나우시카 레퀴엠'과 미니멀리즘

  • 신디사이저의 활용: 초기 지브리 음악은 예산 문제와 당시 트렌드를 반영하여 신디사이저(전자음)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이는 황폐해진 미래 지구의 건조하고 이질적인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 아이의 허밍: 영화 후반부, 거신병과 오무의 폭주가 멈춘 뒤 흐르는 "란~ 란라라 란란란~" 하는 소녀의 허밍 곡(나우시카 레퀴엠)은 사실 히사이시 조의 4살 딸(마이)이 부른 것입니다. 기교 없는 아이의 목소리는 파괴된 세상에서 피어나는 순수한 희망을 상징하며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습니다.

2. 순수의 시절: 이웃집 토토로 (1988) & 마녀 배달부 키키 (1989)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

지브리의 초기작들이 서사적이고 묵직했다면,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일상의 소중함과 동심을 노래합니다. 히사이시 조는 여기서 '리듬감'과 '경쾌함'을 무기로 꺼내 듭니다.

🎵 감상 포인트: 바람이 지나가는 길 (Path of the Wind)

  • 동양적 5음계: <이웃집 토토로>의 삽입곡 '바람이 지나가는 길'은 일본의 전통적인 5음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신비로우면서도 촌스럽지 않은 이 멜로디는 시골 마을의 논두렁과 숲의 정령을 청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 냈습니다.
  • 바다의 보이는 마을 (키키):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는 유럽의 항구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아코디언과 만돌린 같은 악기를 사용하여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왈츠풍의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키키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오를 때 흐르는 바이올린의 피치카토(현을 뜯는 주법)는 비행의 설렘을 경쾌하게 표현합니다.

3. 대서사시의 완성: 원령공주 (Princess Mononoke, 1997)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

지브리 역사상 가장 무겁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룬 <원령공주>에서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웅장한 오케스트라로 진화합니다. 자연과 인간의 전쟁이라는 거대한 스케일을 감당하기 위해 그는 도쿄 시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동원했습니다.

🎵 감상 포인트: 아시타카의 전설 (The Legend of Ashitaka)

  • 비장미의 극치: 도입부의 묵직한 팀파니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오는 현악기 섹션은 주인공 아시타카가 짊어진 가혹한 운명을 대변합니다.
  • 불협화음의 미학: 재앙신(타타리가미)이 등장할 때 쓰인 음악은 불협화음과 금관악기의 거친 포효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자연의 분노와 공포를 본능적으로 느끼게 합니다.
  • 카운터테너의 기용: 주제가 <모노노케 히메>를 여성 소프라노가 아닌 남성 카운터테너(가성) 미라 요시카즈에게 부르게 한 것은 신의 한 수였습니다. 성별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숲의 목소리'처럼 들리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4. 상실과 추억: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001)

"한 번 있었던 일은 잊을 수 없어. 기억해 내지 못할 뿐이지."

일본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했던 이 작품에서 히사이시 조는 '피아노'라는 가장 기본적인 악기로 돌아갑니다. 주인공 치히로의 불안한 심리와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은 화려한 오케스트라보다 담백한 피아노 선율이 더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 감상 포인트: 어느 여름날 (One Summer's Day)

  • 여백의 미: 오프닝 곡인 '어느 여름날'은 제목 그대로 나른하고 몽환적인 여름 오후를 연상시킵니다. 피아노 건반을 꾹꾹 눌러 담는 듯한 연주는 치히로가 겪게 될 이상한 나라의 모험이 결국은 '성장통'임을 암시합니다.
  • 여섯 번째 역 (The Sixth Station): 가오나시와 함께 기차를 타고 제니바를 만나러 가는 장면. 바다 위를 달리는 기차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 위로 흐르는 이 곡은 절제된 피아노와 현악기로 '이별'과 '순환'을 표현합니다. 대사 한마디 없는 이 시퀀스가 영화 최고의 명장면이 된 것은 전적으로 음악의 힘입니다.

5. 삶의 회전목마: 하울의 움직이는 성 (2004)

"기다려, 내가 꼭 갈게. 미래에서 기다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지브리 음악, <인생의 회전목마(Merry-Go-Round of Life)>가 탄생한 영화입니다. 19세기 말 유럽의 낭만과 마법, 그리고 전쟁이 뒤섞인 이 복합적인 세계관을 히사이시 조는 '왈츠(Waltz)'라는 하나의 장르로 묶어냈습니다.

🎵 감상 포인트: 왈츠의 변주

  • 3박자의 마법: 왈츠의 '쿵-짝-짝' 하는 3박자 리듬은 끊임없이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상징함과 동시에, 저주에 걸려 노인이 된 소피와 겁쟁이 마법사 하울의 엇갈리는 관계를 춤추듯이 표현합니다.
  • 변주(Variation)의 향연: 이 영화의 메인 테마는 단 하나입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슬프게, 경쾌하게, 웅장하게 끊임없이 변주됩니다. 특히 후반부, 하울과 소피가 공중 산책을 할 때 오케스트라가 총동원되어 터져 나오는 왈츠는 사랑의 환희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 비하인드: 미야자키 감독은 처음에 이 곡을 듣고 "너무 슬프지 않나?"라고 우려했지만, 히사이시 조는 "이 영화는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전쟁과 사랑의 아픔을 다루고 있다"며 왈츠를 고집했다고 합니다.

6. 미니멀리즘으로의 회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2023)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 번복작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이 작품에서 히사이시 조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갔습니다.

🎵 감상 포인트: Ask Me Why

  • 웅장한 멜로디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Ask Me Why>는 충격적일 만큼 단순하고 고요합니다. 멜로디는 절제되어 있고, 피아노의 여음은 길게 이어집니다.
  • 이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두 거장이 화려한 기교를 모두 내려놓고, 삶과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독백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지 않느냐"는 무언의 메시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마치며: 끝나지 않는 앙상블

히사이시 조의 음악 없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색채가 빠진 그림과 같을 것입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서로에게 최고의 영감이 되어준 두 사람 덕분에, 우리는 2D 화면 속 캐릭터들이 살아 숨 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밤, 눈을 감고 지브리의 OST를 재생해 보세요. 토토로의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하울의 성이 삐걱거리는 소리, 그리고 치히로가 달리던 바다 위의 기차 소리가 당신의 귓가에 생생하게 되살아날 것입니다.

💡 에디터의 추천: 히사이시 조를 200% 즐기는 법 (부도칸 콘서트)

유튜브에서 'Joe Hisaishi in Budokan (Studio Ghibli 25 Years Concert)' 영상을 꼭 찾아보시길 강력 추천합니다.

  • 압도적 스케일: 200명의 오케스트라, 800명의 합창단, 160명의 마칭 밴드가 참여한 전설적인 콘서트입니다.
  • 미야자키의 등장: 콘서트 도중 미야자키 하야오가 꽃다발을 들고 무대로 올라와 히사이시 조에게 건네는 장면은 두 거장의 깊은 우정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순간입니다.

(이 글이 유익했다면 공감과 댓글 부탁드립니다. 다음에는 '신카이 마코토와 래드윔프스'의 음악 세계로 찾아오겠습니다.)